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피 샤를로테 (문단 편집) == 여담 == * [[프랑스 왕국]]의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생)와 친분이 있었다. 두 왕비는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아 친분을 유지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샬럿 왕비의 취향이 서로 비슷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영국식 스타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가 많은 샬럿 왕비의 편지에 의례적인 답장을 보냈지만, 8남 옥타비누스 왕자를 낳은 샬럿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끝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자 샬럿 왕비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의 나라인 영국에서도 똑같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다.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편 [[조지 3세]]는 샬럿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케이크를 선보였는데, 이 케이크의 이름이 바로 '''[[마조트루비용#s-5|샬럿 로얄(Charlotte Royal)]]'''이다. *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 다산할 만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아들들은 정략결혼한 본부인과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정부를 끼고 살았고[* 이 중에서도 최악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조지 4세]]로 아내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별거하고, 이후엔 아예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캐롤라인을 영국에서 쫓아내 왕비로서 대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딸들은 조지 3세 부부가 시집보내는 걸 꺼렸다.[* 조지 3세는 자신의 딸들이 누이들처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여담으로 조지 3세의 딸들은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았다.] 결국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몇 명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며, 아예 정부와 사실혼 관계로 동거하며 사생아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조지 3세의 아들들은 자식을 아예 낳지 못하거나 정부에게서 낳은 사생아만 남기고[* 거의 모든 유럽 왕정에서는 사생아의 왕위 계승을 엄격히 금지했다.] 줄줄히 사망했고, 결정적으로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 공주가 요절하면서[* 샬럿 공주는 장남 조지 4세의 유일한 정실 부인 소생의 외동딸로, 조지 3세의 손자녀들 중에서도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실상 미래 영국의 여왕이 될 것이 확실시 된 상태였다.] 영국의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가까스로 샬럿 왕비와 조지 3세의 4남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딸인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공과의 사이에서 많은 적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많은 유럽 왕실과 혼인을 했다. 그렇기에 아주 먼 후손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론 샬럿 왕비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최대 도시인 샬럿의 유래가 되었으며 [[플로리다]] 남서부의 두 번째로 큰 항만인 샬럿 하보(Charlotte Harbor) 역시 원래는 '카롤루스 아브리고(Carlos abrigo)'라고 불렀으나 후에 영국이 점령한 뒤 이름을 바꿨다. *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왕비다. 국왕의 배우자 중에서도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 재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